대한민국 역사

선릉 -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

beaconhouse 2021. 12. 16. 01:25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1462~1530)의 무덤이다.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이 서로 다른 언덕에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왼쪽 언덕에 정현왕후의 능이, 오른쪽 언덕에 성종의 능이 배치되어 있다.

왕릉의 봉분에는 12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고,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광릉(세조의 능) 이후 조성된 왕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나 선릉에는 병풍석이 설치되었다.

그밖에 석양(石羊)·석호(石虎)·망주석·장명등·문인석·무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장명등의 양식은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의 것을 본떴으며, 문인석과 무인석의 얼굴은 극히 사실적이지만 몸집이 크고 입체감이 없다. 한편 왕비릉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려져 있으며 다양한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왕비릉의 문·무인석은 그 윤곽이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편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懿敬世子) 이장(李暲)과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1457년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세조의 둘째아들인 해양대군(海陽大君) 이황(李晄)이 왕위에 올라 조선의 제8대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이 되었다. 그러나 예종도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죽자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 등을 제치고 성종이 13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469년부터 1476년까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성종은 1467년(세조 13) 한명회(韓明澮)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1474년(성종 5)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1476년(성종 7)에 봉상시(奉常寺) 판사 등을 역임한 윤기견(尹起畎)의 딸 제헌왕후(齊憲王后) 윤씨를 계비(繼妃)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79년(성종 10)에 세자 융(뒷날의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윤씨를 폐비하고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다시 계비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1482년(성종 13)에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였는데, 이 일은 뒷날 연산군 때에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은 이외에도 명빈 김씨(明嬪 金氏), 숙의 김씨(淑儀 金氏) 등 수많은 후궁(後宮)을 두었으며, 그들과 20여 명의 자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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