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

고구려 [ Koguryo , 高句麗 ]

beaconhouse 2022. 1. 2. 05:23

 

 

 

서기전 1세기에서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

 

전체적으로 보아 고구려를 세운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들은 이 지역에서 토착해서 살아왔던 족속이다. 청동기 문화단계에서 요동 방면으로부터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어 서기전 3세기 대에 연(燕)나라가 요동군을 설치한 이후 연의 철기문화를 수용하면서 서서히 발전을 도모해나갔다. 이들은 서기전 1세기 중반 고구려연맹체를 형성한 이후 스스로를 고구려인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국의 성장과 함께 그 세력 하에 포괄되어 들어온 예맥계의 옥저(沃沮)·동예(東濊)·부여(夫餘)·조선(朝鮮) 등의 여러 종족들이 원 고구려인을 중심으로 상호 융합하여 보다 확대된 고구려인을 형성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한인들도 융합되어 들어왔으며, 남녁의 한(韓)족의 일부도 그러하였다.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평양 땅에 외국의 통치기구가 설치된 것은 B.C. 108년고조선()이 망하고 낙랑군 조선현()이 설치된 이후 776년 만이다. 낙랑군과 안동도호부는 동일하게 평양지역에 설치한 중국왕조의 통치기구였지만, 이 지배 기구를 설치하는 과정은 양자가 판이한 면을 보였다. 즉 한제국이 고조선을 멸망시키는데 육군 5만과 해군 8천이 동원되어 1년여의 공방전이 소요되었다. 평양 지역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은 그 뒤 400여년을 지속하다가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구축되었다. 그에 비해 668년 평양성 함락에는 수와 당 2개 왕조에 걸쳐 70년이 소요되었다. 통일중국왕조인 수는 고구려 원정에서의 패배가 주요 원인이 되어 멸망하였다. 당은 오랜 전쟁 끝에 신라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어 설치된 안동도호부는 불과 8년 만에 고구려부흥운동군과 신라에 밀려 만주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차이를 낳게 된 것은 무엇보다 B.C. 108년과 A.D. 668년 사이에서 일어났던 변화에 기인한다. 즉 고조선사회와 중국의 전국시대 사회 간에는 현격한 문화적·물질적 격차를 보였다. 진·한제국이 성립한 뒤에도 그 격차는 여전하였다. 그 결과는 고조선의 멸망과 한군현의 설치로 나타났다. 서기전 108년 이후 예·맥·한족의 여러 집단들은 한편으로 한군현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한군현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자기사회의 발전을 도모하여, 중국사회와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선두에서 이런 움직임을 이끌어나간 것이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문화는 신라·백제·가야 등에 전해져 그들의 발전을 견인하였다. 삼국시대의 후반에 들어서, “문자와 무기가 중국과 같다”라는 상징적 표현이 함축하고 있듯이, 한국고대사회는 중국고대사회와 별다른 큰 격차 없이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70여 년에 걸친 수·당제국과의 항쟁, 이은 나당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바이다.

 

 

서기 전후 무렵부터 668년에 이르는 고구려의 존립기간은 삼국시대의 대부분을 점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고구려국은 작은 성읍국가에서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아우르는 큰 영역국가로 성장하였고, 그 영역 내의 예()·맥()·한()계의 여러 집단들과 일부 한인()과 말갈인들을 융합하여 고구려인이라는 보다 큰 단위의 족속을 형성하였다. 그와 함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여러 갈래 문화를 수렴하고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건설하였다. 고구려 문화는 신라·백제·가야와 바다건너 왜국에 영향을 주었으며, 말갈족은 고구려 문화의 훈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곧 고구려는 고대 중국사회와 고대 한국사회 간의 발전의 격차를 극복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독자성과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건설하였으며, 고구려인은 한국인의 형성에 한 축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Koguryo, 高句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